오토(auto) 2014. 11. 18. 18:24

 

するめ []

말린오징어

 

 

 

 

 

 

 

 

 

 

 

 

 

 

 

 

 

 

 

이까수루매에 얽힌 사연(2)

 

 

 

(작성 중)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이까’와 ‘수루매’라는 말이 있다. 둘 다 표준어(標準語)로 ‘오징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들 말은 모두 우리나라 말도, 경상도(慶尙道) 사투리도 아닌 외래어적 일본말이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식민지(植民地)로 삼고, 저들의 말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심어놓은 말을 우리나라 사람들과 경상도 사람들이 이를 경상도 동남부(東南部)지방의 사투리쯤으로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마른오징어’든 ‘물오징어’든 모두 ‘수루매’나 ‘이까’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그 시절을 살아오신 어른들 사회의 경우다.

 

 

 

 

 

이 까(물오징어)

 

 

 

 

 

 

 

그래서 “건맹태 수무마리를 뀐 거를 한 ‘때’라 카고, ‘이까’ 수무마리 무꾼 거를 한 ‘축’이라 칸다”는 용례가 있다. 표준어(標準語)로는 “건명태 스무 마리를 꿴 것을 한 ‘때’라 하고, 마른 오징어 스무 마리를 묶은 것을 한 ‘축’이라 한다”는 뜻이다.

 

어느 파일에서 소개드린 대로 여객용 항공기가 없었던 당시의 일제시대(日帝時代)에는 부산을 비롯한 동남부 해안으로 일본인들이 떼를 지어 들어왔고, 일본말을 그곳에서부터 퍼뜨렸기 때문에 전래되는 우리 고유의 말이 아닌 일본말은 일단 경상도사투리로 지목을 하곤 했었다.

 

‘이까’와 ‘수루매’의 어원(語源)을 먼저 살펴본다. 일본에서 ‘오징어’를 가리키는 말은 ‘이카(いか, 烏賊)’이다. ‘이까’는 저보다 큰 적을 만나면 검은 먹물을 쏘고 달아나기 때문에 그 행동거지를 나타내기 위해 중국과 우리나라에선 오적어(烏賊魚)라 하였다.

 

일본에서도 ‘이카(いか)’라고 쓰고 ‘오적(烏賊)’이란 한자명을 붙인 것은 그런 연유에서이다. 고사기(古史記)나 일본서기·정창원문서 등에는 오징어를 이르는 보통명사로서 일찍부터 ‘이카(いか)’로 올라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컫는 ‘이까’에는 ‘꽁치 이까’라는 종류(種類)도 있다. 일본(日本)에서는 이것으로 ‘샐러드’를 주로 만들어 먹는다.

 

 

 

 

꽁치 이까

 

 

 

 

 

 

 

예전 일본의 ‘나라’시대에는 ‘이가(伊加)’로 표기하고 ‘이카(いか)’로 읽었다. 이렇게 보면 ‘이카’라는 말은 원래부터가 일본 토착어(土着語)였으며, 해양족인 폴리네시아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도 ‘이카’가 보통명사(普通名詞)이기 때문에 세부적으로 종류를 지칭할 때는 그 앞에 종류를 설명하는 말이 따로 붙는다. 화살오징어는 ‘야리이카(やりいか, 한치)’, 붉은 오징어는 ‘아카이카(あかいか)’, ‘갑오징어’는 ‘갑오적(甲烏賊)’으로 쓰고 갑(甲)을 ‘こう(고-)’로 읽어서 ‘고-이카(こういか)’라고 부른다.

 

 

 

 

‘이까’ 샐러드

 

 

 

 

 

 

 

그리고 이러한 어원(語源)에 비추어보면 ‘이까’는 물오징어를 이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우리가 잘 아는 말린 오징어는 ‘스루메이카(するめいか)’라 부른다. 동남해(東南海)에서 주로 잡히며, 우리가 가장 널리 먹고 있는 ‘오징어(학명 : 피둥어 꼴뚜기)’가 바로 이것이다.

 

이들 어원(語源)에 따르면 우리가 말린 오징어를 ‘수루매’라고도 하고, ‘이까’라고도 하는 것은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스루메이카(するめいか)’가 말린 오징어인데, ‘스루메(するめ)’와 ‘이카(いか)’라는 하나의 단어를 두 개로 분리하여 이를 모두 ‘말린 오징어’라고 하는 것은 맞는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예로부터 바다 물고기에 관심(關心)이 별로 없던 우리나라에서는 ‘오징어’를 ‘쓰레미’라고 불렀다. 지금의 80대 이상 할아버지들은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

 

 

 

 

 

 

오징어 구조

 

 

 

(흔히들 오징어의 머리를 위쪽의 ‘지느러미’쪽으로 알고 있으나,

아래쪽이라고 볼 수 있다. 눈도, 입을 대신하는 ‘빨판’이 달린

‘다리’와 ‘촉완’ 즉, 촉수(觸手)도 모두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어 ‘스루메(するめ)’는 오히려 그 원형(原形)이 우리나라 말에서 연유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말을 추적(追跡)할 수 있는 단어가 아직 남아있는데, 우리말에서 흔히 쓰는 ‘술’이라는 말이다.

 

마시는 ‘술’이 아니라 여러 가닥의 줄을 한데 모아 장식용(裝飾用)으로 만든 노리개 끝의 ‘술’을 말한다.

 

꽃잎 한가운데 꽃받침에서 수염처럼 연장(延長)되어 나온 암꽃·수꽃의 ‘꽃술’을 가리킬 때도 이 말을 쓴다. 지방에 따라서는 ‘수술’이라고도 한다.

 

‘노리개’ 등에 큰 붓털처럼 치렁치렁 늘어뜨린 실 묶음인 ‘술’이라는 말을 늘여서 발음하면 ‘수르(수루)’라는 음이 나오는데 이 음이 바로 ‘스루’의 기본형(基本形)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루메’의 ‘메(め)’는 ‘눈’이란 뜻의 우리말이다. 결국 ‘수루매’란 ‘술’처럼 여러 가닥의 다리가 붙어 있고, 큰 눈(=‘메’ 또는 ‘미’)이 달린 물고기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수루매

 

 

 

 

 

 

 

이 ‘수르메(수루메)’가 옛적 한글에서는 한층 강화(强化)된 음으로 ‘쓰리매(쓰레미)’ 또는 ‘쓰리메’라는 이름으로 표기되기도 했었다.

 

결론적으로 일제시대 때 ‘스루메(するめ)’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전해져서 ‘쓰레미’와 ‘쓰리메’를 탄생시켰다고 보는 것은 우리말 ‘수르메’와 본래 같은 뿌리의 말이었고, 지역에 따라 다양한 방언(方言)으로 불렸기 때문에 겪는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어 ‘스루메(するめ)’는 그 어원이 우리나라 말인 ‘수르메(수루메)’를 그 원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일 뿐, 흔히 경상도 동남부지방 사투리라고 지목하는 ‘이까’와 ‘수루매’는 모두 일본말임에는 변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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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 해설은 이정도로 그치고, ‘오징어’의 개요를 잠시 살펴본다. 회원님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오징어’는 몸은 가늘고 길며, 꼬리 쪽에는 한 쌍의 원형 또는 삼각형의 지느러미가 있다.

 

몸길이는 10 ~ 25cm이나 대형 오징어도 있다. 요즈음 사람들이 흔히 ‘오징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살오징어’를 말한다.

 

 

 

 

 

구운 살오징어

 

 

 

 

 

 

 

자산어보, 동의보감, 전어지, 규합총서 등에도 오징어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거기에서 일컫는 오징어는 모두 ‘갑오징어’를 말한다. ‘살오징어’가 우리나라에서 주된 어종으로 등장한 것은 1930년대라고 한다.

 

그 전까지는 ‘갑오징어’만이 오징어 대접을 받았다. 일제시대(日帝時代) 때부터 ‘살오징어’가 널리 알려진 까닭에 아직도 그 시대를 살았던 어른들은 마른 ‘살오징어’를 두고 ‘수루매’라고 한다.

 

‘살오징어’는 주로 우리나라 동해(東海)에 분포한다. 특히 울릉도(鬱陵島) 근해에서 많이 잡히며, 맛도 전 세계에서 가장 좋다고 한다.

 

‘살오징어’는 2월, 3월, 4월에는 거의 잡히지 않다가 5월 중순부터 조금씩 잡히기 시작하여 9월과 10월에 가장 많이 잡힌다.

 

한자어로는 오적어(烏賊魚)라 하는데, 이는 오징어가 까마귀를 잡아먹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까마귀 떼가 바다 위를 나를 때 바닷물 위에 떠서 죽은 척하고 있다가 이것을 보고 달려드는 까마귀를 두 개의 긴 다리로 칭칭 감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 잡아먹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中國) 어민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진(秦)나라 황제가 바다에 버린 산대(算袋;붓이나 벼루를 넣는 휴대용 자루)가 오징어로 변한 것이라 하며, 이 때문에 모양도 비슷하고 몸속에 먹물이 들어 있다고 한다.

 

 

 

 

‘수루매’ 잡이 배

 

 

 

 

 

 

 

우리나라에서는 100개의 뼈를 가진 ‘복어’에서 1개만을 취한 뼈가 오징어 뼈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고, 일본(日本)에서는 오징어의 먹물이 뱀의 독을 해독(解毒)한다는 이야기와 오징어가 뱀의 몸에 먹물을 내뿜었더니 토막이 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잠시 ‘수루매’잡이 돛배들이 일렁이는 파도(波濤)에 몸을 맡긴 채 출어(出漁)를 기다리는 부둣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작자미상의 ‘선창가-1’을 잠시 음미하고 넘어간다.

 

 

 

 

 

 

 

 

 

 

 

선창가-1

 

 

 

 

 

성숙한 여인

비로드 치마자락

오렌지 빛 밤바다에 누웠다.

 

검붉은 일렁임

혼자 몸 짓 아닌 것은

바람 곤한 亥時 무렵

선착장 밀어내는 마지막 뱃고동

 

따르는 갈매기 떼

염치 없어 부산스러워도

지친 나그네 노랫말 들어 주는데

 

노을은 하매

수루매 잡이 불빛 된지 오래 건만

외로움 부풀어 섣부른 낭만

목이 메어 눈물이 흐른다

 

거뭇한 섬

갯내음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고

늙은 개 밭은 기침소리

휘적이는 뱃 고물 닿았는 줄

어찌 아는가

 

서걱서걱 밤을 지날

마른 들판에 누워 하늘을 보니

이루지 못할 약속

꿈인듯 생시 인듯 별빛에 흔들려

 

재여 있던 시름

나뭇결 처럼 첩첩하고

생선 만지던 늙은 할미

뱃가죽 같은데

 

조각달 매인 선창가 신음소리

괴괴하구나

 

 

 

 

 

 

 

 

 

 

이하에서는 오징어의 짧은 일생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오징어의 모성애(母性愛)는 대단한 것으로 관찰되고 있다.

 

일반적(一般的)으로 오징어의 어미는 알만 낳으면 곧 바로 떠나버리는 비정(非情)한 어미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 알려진 말이다.

 

오징어의 수명(壽命)은 1년 남짓한데, 어미 오징어는 산란(産卵)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산란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어미 오징어가 낳은 알은 다른 물고기들이 특히 좋아하는 먹이에 속한다.

 

 

 

 

포구에 정박중인 오징어잡이 어선

 

 

 

 

 

 

 

때문에 어미 오징어들은 매우 신중하게 알자리를 선택(選擇)해서 산란을 하는데, 바닷가 물속 모래톱에 서식하는 ‘말미잘’ 곁에 알을 낳음으로써 교묘한 위장술(僞裝術)로 다른 물고기의 접근을 막는다. ‘말미잘’은 맹독성(猛毒性)이 있어 물고기들이 접근을 꺼리기 때문이다.

 

알에서 깨어날 새끼들을 최선을 다해 보호(保護)하기 위해서다. 어미 오징어들은 산란을 마친 후에는 최후의 순간(瞬間)까지 자신이 낳은 알을 보살피다 그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도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오징어는 주로 밤에 사냥을 한다. 큼직한 ‘쥐치’도 오징어에게 걸리면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다. 그런 오징어의 최대 사냥 무기는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10개의 다리에 달려있는 빨판이다.

 

그리고 오징어에게 있어 먹물은 구원투수(救援投手)와 같은 물질이다. 위급한 상황에 닥치면 먹물을 쏜 후 줄행랑을 친다.

 

그러나 천하의 오징어도 사람들이 드리운 낚시용 ‘미끼’의 유혹(誘惑)을 빗겨가지는 못한다. 대다수 오징어들은 어미 없이 홀로 태어나 성장(成長)했기 때문에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인간들의 ‘미끼’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징어 낚시

 

 

 

 

 

 

 

밤바다의 낚시 바늘에 낚여 뜻밖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신세가 대다수 오징어의 운명(運命)이다. 어미가 살아 있어 그런 ‘미끼’를 먹으면 안된다는 교훈(敎訓)을 남겨준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다시 어린 두 자매(姉妹)가 어머니께서 오일장마다 이고 나가 팔던 장독대 항아리 속 ‘수루매’를 꺼내다가 그만 항아리 뚜껑을 깨버린 애틋한 유년시절(幼年時節)의 글 ‘오징어에 얽힌 사연’을 잠시 음미해 본다.

 

 

 

 

 

 

 

 

 

 

 

오징어에 얽힌 사연

 

 

 

 

유년시절 언니와 나란히 자라던 그 시절

어머니 마른오징어 나보다 큰 장독대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어 두시고

장날이면 시장으로 팔러 가신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먹을 것이 없기에 언니와 나는 어머니 모르게

오징어를 꺼내 먹으려고

큰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항아리 속은 온통 오징어 집이었다.

 

 

 

무지무지 많기에 한 마리 슬쩍 꺼내고

침을 꼴깍 삼키면서 항아리 뚜껑을 닫는 순간

‘오마이갓’ 일이 벌어졌다

그만 뚜껑이 쨍그랑 귀퉁이가

떨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언니야 우리 이제 우야노

큰일 났다 언니는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고

그래도 난 꾀를 부렸다 뚜껑을 살짝 돌려서

덮어 두고 그날은 무사히 넘어갔다.

 

 

 

그런데 며칠 지나고 어머니의

청천벼락이 떨어진다.

언니와 나는 오징어 한 마리 먹으려다

항아리 깨고 어머니한테 하루 종일 벌 서면서

두 눈에 흘린 눈물 밥 굶은 하루

 

 

 

유년시절 마른오징어 사연

그 후로 언니와 나는 오징어만 보면

그때 흘린 참회의 눈물이 지금은 웃음으로

잊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다.

 

 

 

 

 

 

 

 

 

 

 

옛적에는 극장에 가면 으레 입구 매점에서 구운 ‘수루매’를 팔았고, 한 마리씩 사들고 들어가 질겅질겅 씹어 먹으며 영화를 관람했다. 물론 1류 극장이나, 개봉관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3류 극장에는 아예 객석통로에 판매원을 배치해 구운 ‘수루매’를 팔기도 했었다.

 

중소도시 극장에서는 밖에서 ‘수루매’나 군밤을 사서 가지고 들어가도 제지하지 않았고, 옆에서 ‘수루매’를 찢어먹고, 군밤을 깨물어 먹어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3류극장 같은 경우는 객석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었다.

 

 

 

 

 

그 시절 변두리 3류 극장

 

 

 

 

 

 

 

 

그 시절 ‘수루매’를 제일 많이 팔고 사먹는 곳은 단연 완행열차(緩行列車) 객차 안이었다. 물론 오일장마다 옮겨 다니는 유랑극단(流浪劇團)의 가설극장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기차여행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시절의 완행열차와 ‘강생회(康生會)’나 ‘홍익회(弘益會)’의 바구니 장수들을 기억할 것이다. 처음에 설립된 단체가 ‘강생회’였고, 얼마 뒤 이름을 바꾼 것이 ‘홍익회’였다.

 

얘기가 나온 김에 여기에서 잠시 ‘홍익회(弘益會)’의 태동연혁을 알아본다. 외동향우회 카페회원들은 무엇이든 모르는 게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홍익회’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에 있는 철도종사자(鐵道從事者) 복지사업단체를 말한다.

 

철도청(한국철도공사) 재직중 공상(公傷)으로 퇴직한 사람들과 순직유가족, 그리고 생계가 어려운 장기근속퇴직자를 원호(援護)하는 한편, 재직자의 복지사업과 철도여객에 대한 봉사와 편의를 제공하는 비영리(非營利) 공익재단법인이다.

 

1936년 ‘철도강생회(鐵道康生會)’로 발족하여 1943년 ‘교통강생회’로 변경했다. 1961년 교통부 산하의 4개 유사법인을 ‘강생회’로 통합했으며, 1967년 현재의 이름인 ‘홍익회(弘益會)’로 변경하였다.

 

2005년 1월 철도청의 공사화(公社化) 계획에 따라 한국철도공사로 전환하면서 ‘홍익회’ 사업도 분리되었다.

 

주요 사업내용은 ①철도구역 구내 및 열차내 상품 판매, ②하역 및 광고, ③부동산임대 및 시장개설 운영사업, ④농산물 전문가게 홍익스토어 사업 등이다.

 

 

 

 

 

강생회 아가씨

 

 

 

 

 

 

 

 

현재 식품사업을 위해 경기도 기흥(器興)에 일양식품공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하역사업으로 강원도(江原道) 동해시에 ‘묵호 하역사업소’와 경기도(京畿道) 의왕시에 ‘부곡 컨테이너 하역사업소’를 운영하고 있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역(驛)이란 역은 모두 정차(停車)하여 승객을 태우거나 내려주고 가는 완행열차가 흔들거리면서 출발하면, 어김없이 ‘강생회’ 아저씨들이 나타난다.

 

커다란 대나무 바구니에 삶은 계란(鷄卵)이며 오징어, 사이다, 빵을 담아서 통로(通路)를 오가면서 “심심풀이 땅콩 있어요. ‘수루매’ 있어요.”라며 외치고 다녔다.

 

옛적 '강생회(康生會)' 때는 단정한 복장차림의 예쁜 아가씨들이 예쁜 바구니를 들고 통로를 왕래하며, 껌이나 '은단' 등을 팔기도 했었다.

 

지방에 따라서는 “따끈따끈한 우유 있셔, 오징어와 땅콩 있셔.”라는 멘트도 들렸다. 열차여행을 하다보면 으레 어디선가 들려오는 구수한 목소리와 특유(特有)의 정감 있는 멘트 때문에 제법 든든한 속이지만, 이내 간식거리를 찾게도 된다.

 

그리고 열차여행(列車旅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은 계란과 사이다’ 커플이다. 몇 시간씩 이어지는 장시간(長時間)의 열차여행에 허기를 달랠 때 삶은 계란만큼 탐스러운 먹거리도 없다.

 

껍데기를 까서 한입 베어 물고 씹다가 목이 메면 시원한 사이다 한 모금으로 넘기는 그 맛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아이들과 여성들의 경우다. 남자들은 병맥주나 소주(燒酒)를 사서 모르는 옆 사람과 한 잔씩 돌려가며, ‘수루매’를 뜯는다.

 

 

 

 

 

완행열차 객실

 

 

 

 

 

 

 

 

그러나 서민(庶民)들은 문자 그대로 화중지병(畵中之餠)이었다.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거나 서서 가는 기차 안에서 천금(千金) 같은 돈을 들여 군것질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푼이라도 아껴 아이들의 사친회비(師親會費)를 마련해야했고, 농자금을 장만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 서민들은 기차여행 전에는 가고 오는 동안 배고프지 말라고 든든하게 밥을 먹고 기차를 탔다.

 

‘수루매’나 김밥은 비싸서 감히 사먹을 생각조차 못했고, 사이다도 용돈을 아끼고 아껴야 계란과 함께 한 병쯤 사 먹을 수 있었다.

 

‘철거덩 철거덩~’ 바퀴와 레일이 부딪치는 굉음을 내면서 덜리는 열차는 역마다 정차하다가 큰 역에는 잠시 쉬어가는 시간도 있었다. 그곳에는 으레 가락국수를 파는 포장마차 같은 판매소가 있었다.

 

그때마다 재빨리 내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락국수를 급하게 후루룩 들이 마시고 타는 신사들의 모습은 내심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그 시절 완행열차

 

 

 

 

 

 

 

그러나 이제 그 시절의 그 완행열차(緩行列車)도, 강생회 아저씨도, 뽀오얀 빛깔의 수루매도, 순박하고 인정미 넘치던 하얀 옷 입은 승객들도 모두들 어디론가 사라지고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어졌다.

 

벽면으로 좌석(座席)이 늘어서 있던 ‘비둘기호’ 완행열차에서 삶은 달걀을 까먹고 사이다를 마시며, ‘수루매’를 찢어 질겅질겅 씹던 추억은 이제 박물관(博物館)에서나 느낄 수 있을 만큼 세상도 변하고, 열차도 변하고, 사람도 변해 버렸다.

 

경상도에서는 반건조(半乾燥) 상태의 오징어를 ‘피데기’라 하고, 울릉도(鬱陵島)에서는 이를 ‘하루바리’라고 한다. 그리고 ‘갑오징어’ 새끼나 ‘꼴뚜기’를 ‘호래기’라고도 한다. 시장에 가면 ‘호래기젓’이라는 젓갈이 있다.

 

 

 

 

 

피데기

 

 

 

 

 

지루하시거나 바쁘신 분 그만 읽으시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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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 친구를 따라 무전여행(無錢旅行)을 다녀오면서 겪은 완행열차 객실 풍경을 소개하면서 파일을 접는다. 1968년 초가을에 조금은 괴짜인 친구의 집요(執拗)한 꼬임으로 강릉(江陵)쪽으로 무전여행을 간 일이 있었다.

 

가진 돈도 몇 푼 없이 그야말로 단출하게 당시의 청량리역(淸凉里驛)에서 강릉행 야간기차에 올라탔다. 무전여행이니 당연히 무임승차(無賃乘車)였다.

 

 

 

 

 

그 시절 청량리역

 

 

 

 

 

 

 

 

밤 기차(汽車)는 칙칙 거리며 남쪽을 향하여 굉음(轟音)을 토하며 달리고 있었다. 꽁짜로 도둑차를 탔기 때문에 객차(客車)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승강구(昇降口) 연결부위에 엉거주춤하게 쭈그리고 앉았다.

 

여차하면 다른 칸으로나, 반대편 승강계단(昇降階段)으로 토끼기 위해서였다. 워낙 차내(車內)가 복잡하여 검표(檢票)를 자주할 수는 없었지만, 강릉까지 가려면 최소한 한 번 정도의 차표검사는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정도 지나니까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친구 놈이 몸을 한번 부르르 떨더니 “야!~씨발 떨려서 못살겠다. 안에 들어가자”라며 벌떡 일어난다.

 

가을이라지만 밤이 깊어지니 추워졌다. 사람이 꽉 차서 잘 열리지도 않는 출입문(出入門)을 엉덩이로 밀고 객실(客室)로 들어가니 후덥지근한 열기가 와락 밀려나온다.

 

어둑한 객실 안은 담배연기로 숨쉬기조차 거북했다. 아기들 칭얼거리는 소리에 거나하게 한 잔 취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왈패들의 욕지껄이, 여기저기서 비포장(非鋪裝) 자갈길에 ‘도라꾸’가는 소리 같은 코고는 소리가 난무한다.

 

 

 

 

 

그 시절 완행열차 객실

 

 

 

 

 

 

 

 

썩은 감 냄새 같은 술 냄새에, 담배연기 냄새까지 진동(振動)을 하니 처음 떠나는 무전여행이 초장(草場)부터 어쩐지 영 아니다 싶었다. 좌석에 앉은 사람보다 서 있는 사람이 더 많았다.

 

당시의 완행열차(緩行列車) 객실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여름 해수욕(海水浴) 철이면 경부선이든, 중앙선이든, 동해북부선이든 열차마다 피서객(避暑客)들이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지만, 말썽꾸러기 청소년들은 열차를 아예 난장판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의자와 통로(通路)를 점령하고 통키타를 두드리며, 악을 쓰면서 뜻도 모르는 영어노래를 돼지 멱따는 소리로 내뱉는가 하면, 좌석 양쪽을 모두 차지하여 ‘드럼’이나 ‘심벌’까지 설치해 놓고 열차 안을 온통 아수라장(阿修羅場)으로 만들어 버린다.

 

 

 

 

 

개판치는 청소년들

 

 

(드럼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부근에는 사람들이 모두 피해버렸고,

맞은편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은 아가씨는 눈을 질끈 감고 있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객실(客室) 안에 들어가 얼마 되지 않아 앞쪽 문이 삐거덕 거리며 열리더니 ‘강생회(康生會)’ 아저씨가 산더미 같이 ‘먹거리’를 담은 대나무 바구니를 어께에 둘러매고 들어선다.

 

쉰 목소리로 “찐계란, 카스테라빵 있어요. 사이다, 콜라, 맥주, 소주도 있~습니다! 쫄깃한 ‘수루매’도 있십니다. ‘수루매’는 굵은 다리 열 개를 공짜로 끼워 드립니다”라며, 승객들의 얼굴을 훑어나간다.

 

‘강생회’ 아저씨가 지나 갈 때는 입석(立席) 손님들은 비켜서느라 웅성거리고,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이것저것 사서 히히덕거리며 마시고 씹는다.

 

앉아서 편하게 먹는 사람, 흔들리며 서서 먹는 사람 등 참으로 요지경(瑤池鏡) 풍경이었다. 필자들도 없는 돈에 2홉들이 소주(燒酒) 한 병과 ‘수루매’ 한 마리를 사서 선채로 나팔을 불면서 ‘수루매’ 몸통을 찢어 질겅질겅 씹었다. 그 당시의 필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여서 술을 마실 때였다.

 

술기운이 돌자 온몸이 노곤하여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졸고 있는데, 누가 어께를 툭툭 치면서 깨우고 있다. 둘 다 피곤한데다 소주(燒酒)까지 마신 터라 바닥에 주저앉아서 졸았든 모양이다.

 

비실비실 일어나 보니, 차장(車掌)이 기차표를 내 놓으란다. 술기운에 노곤하여 통로(通路)에 주저앉아 잠이 든 통에 도망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단정한 복장에 허리에 45구경 권총을 찬 헌병(憲兵)이 필자들을 꼬나보고 있었다. 둘 다 염색(染色)도 하지 않은 군용(軍用) 야전잠바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수상하게 본 것이다.

 

두발(頭髮)이 장발이라 탈영병(脫營兵)이라고 보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어딘가 수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직장인(職場人)이든, 실업자든, 대학생이든, ‘노가다’든 거의가 검정색으로 염색한 군용 야전잠바를 입고 다녔는데, 필자들은 무슨 ‘똥배짱’으로 시퍼런 미제(美製) 중고 야전잠바를 그냥 입고 있었다.

 

헌병(憲兵) 뒤에는 새까만 가죽잠바를 입고, 눈깔이 ‘뱁새눈’처럼 생긴 40대중반의 사나이가 서 있었는데, 마치 고양이가 쥐를 덮치려는 폼으로 필자들을 째려보고 있었다.

 

결과는 참으로 고약하게 되었다. 무임승차(無賃乘車)에 신분마저 수상한 놈들로 몰려 기차에서 끌려 내려 간 곳이 영주역(榮州驛) 구내에 있는 ‘군경파견소’였다. 한참동안 번갈아 가며 조사(調査)를 받았는데, 문제는 열차운임이었다.

 

지금까지 무임승차를 하고 온 열차비(列車費)가 아니라, 앞으로의 열차비가 문제가 된 것이다. 그냥 돌아가든, 강릉(江陵)까지 여행을 계속하든, 남은 여정(旅程)은 무임승차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차표(車票)를 사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냥 나가면 울타리를 뚫고 다시 들어와 또 무임승차(無賃乘車)를 할 것이니 내 보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시절 기차표

 

 

 

 

 

 

 

 

줄담배를 태우던 ‘뱁새눈’이 무슨 대단한 해결책(解決策)이라도 구상한 듯이 필자들을 자기 책상 앞으로 불러 세운다.

 

“니거들, 청량리에서 영주(榮州)까지 온 차비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돌아가는 차편은 우리가 ‘곱배’를 태워 줄테니 무전여행(無錢旅行) 그만두고 서울로 그냥 돌아가겠느냐”고 묻는다.

 

친구 놈의 꼬임으로 따라나선 필자는 이래저래 짜증스럽기도 하고, 괜찮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겠다고 했는데, 친구 놈은 ‘무슨 소리냐’며 게거품을 문다.

 

“큰 맘 먹고 나섰는데, 그냥 돌아가면 다른 친구들 앞에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떻게든 우리가 알아서 강릉까지 갈테니 그냥 좀 내보내 주십시오”라면서 고집을 부렸다.

 

“그래? 그러면 너희들 집으로 전화(電話)라도 해서 빨리 돈 부쳐달라고 해라. 그동안은 무임승차로 경찰서(警察署)에 넘겨 구류 며칠 살려줄게.”라면서 돌아 앉아버린다.

 

일이 더 꼬여버리고 말았다. 잠자코 이것저것 궁리를 하던 친구 놈이 평소에 갈고 닦은 말솜씨를 발휘(發揮)하여 구걸행각을 펼치기 시작했다.

 

‘뱁새눈’을 붙들고, “형사님, 집에 돌아가면 즉시 우체국(郵遞局)으로 바로 송금해 드릴테니 강릉까지 가는 차비와 강릉에서 서울까지 가는 두 사람의 차비(車費)만 좀 빌려주십시오.”라면서 때를 쓰기 시작했다.

 

잠은 아무데나 텐트 치고 자면 되고, 먹는 것은 적당히 얻어먹으면 된다면서 묻지도 않은 너스레까지 늘어놓았다.

 

둘 다 명년에 대학원(大學院)에 진학할 예정으로 시험 공부하다가 너무 갑갑하여 남들이 다녀왔다는 무전여행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體驗)하기 위하여 일부러 무일푼으로 떠난 것이지, 돈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간곡한 보충설명(補充說明)까지 곁들였다.

 

친구 놈의 아버지는 제법 큰 중소기업체(中小企業體)를 운영하던 졸부(猝富)였었다. 그래서 친구는 주머니에 있던 돈뭉치를 모두 꺼내 책상서랍에 넣어두고 최소한의 용돈만 들고 무전여행 길에 오른 것이다. 물론 필자도 그 놈의 말을 듣고 일부러 가진 돈까지 집에 두고 따라나섰다.

 

말이 잘 통하지 않자 열차(列車)에서 먹다 남은 ‘수루매’ 다리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좀 잡숴보세요”라는 아양을 떨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루매’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친구 놈의 열변(熱辯)을 경청한다.

 

 

 

 

 

구운 ‘수루매’

 

 

 

 

 

 

 

 

‘뱁새눈’은 ‘수루매’다리를 다 씹어 먹더니 친구 놈의 표정(表情)이 그런대로 진지하게 보였던지 “내가 형사생활 20년에 이런 놈들은 처음 본다”고 너털웃음을 쏟아놓는다. 희망적(希望的)인 조짐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뱁새눈’이 헌병(憲兵)을 쳐다보면서 “어이 김병장, 자네들 비상금(非常金) 챙겨 놓은 것 좀 있지?”라고 물으니, 헌병이 “있기는 있습니다만, 아무렇게나 쓰면 안 되는데요.”라며 머뭇거린다.

 

“얘들이 보내 준다잖아, 내가 반쯤 내놀테니까 니들도 반쯤 내놔라”더니 자물쇠로 채워놓은 자기들 책상서랍에서 독립문(獨立門)이 그려진 배추색 100원짜리와 남대문(南大門)이 그려진 푸르스름한 500원 권 몇 장씩을 꺼내더니 친구 놈 앞에 내던진다.

 

열차 안 검문(檢問) 때 휴가증을 잃어버린 촌뜨기 휴가장병(休暇將兵)들이나. 차표(車票)를 분실한 사람들, 또는 무임승차자들에게 겁을 주고 뜯어 낸 돈들이었다.

 

필자들도 어수룩하게 보였으면 갈취를 시도했을 것이다. 물론 땡전 한푼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친구 놈의 아버지가 회사 사장(社長)이고, 필자가 몇 번씩이나 보증(保證)을 하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잘하면 서울에 볼일이 있어 올라가면 이런 인연으로 칙사(勅使) 대접이라도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인 듯도 했다.

 

“니거들 이거 집에 가는 대로 바로 안 갚으머, 죽을 줄 알아, 알았어”

 

천하의 노랭이 같은 ‘뱁새눈’에게서 넉넉하게 돈을 빌린 필자들은 무전여행을 사실상 포기(抛棄)하고, 당당하게 표를 사서 잽싸게 열차에 뛰어올라 자리까지 차지하고 강릉(江陵)을 향했다.

 

영주역 매점(賣店)에서는 커다란 ‘수루매’ 네 마리를 사서 두 마리는 연탄불에 굽기까지 하여 열차안에 들어가자 마자 소주(燒酒) 파티를 벌이기도 했었다.

 

 

 

 

기차역 매점

 

앞자리에 앉은 중늙은이와 강릉에서 식당을 한다는 ‘뺑덕어미’처럼 생긴 아줌마에게도 몇 잔씩이나 종이 ‘꼬뿌’를 쥐어주면서 안주로 드시라고 그 두꺼운 ‘수루매’를 반 토막씩이나 호기롭게 찢어주기도 했었다. 물론 친구 놈이 그랬다.

 

강릉에 가서는 기차 안에서 만난 ‘뺑덕어미'를 따라가 아예 그 집에서 3일 동안이나 자 누워가면서 ‘이까 볶음’을 포식(飽食)하기도 했었다.

 

서울에서 이사왔다고 상호도 '서울식당'이라고 지어져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까’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물오징어’를 말한다.

 

‘이까 볶음’은 물오징어를 썰어 넣고, 갖은 양념을 하여 볶은 것으로 당시의 강릉(江陵)에서는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술안주 특히 소주(燒酒) 안주로는 그 이상의 것이 없었다.

 

식당 옆에 붙은 민박용(民泊用) 방을 하나 빌려 매일같이 저녁이 되면, 술값은 필자들이 부담하고, ‘이까 볶음’은 '뺑덕어미'가 제공(提供) 했었다.

 

제공(提供)했다기보다는 같이 먹었다고 하는 편이 맞는 말인 것 같다. 과부(寡婦)로 살면서 풍채도 조그마한 여편네가 웬 놈의 술이 그리 센지 ‘기암’할 정도였다.

 

언변(言辯)이 좋은 친구 놈은 ‘니나노’도 너무나 잘 불러 ‘뺑덕어미'와 ‘이까 볶음’을 먹을 때면, 그녀로 하여금 추녀 밑에 정갈하게 씻어놓은 사기요강을 서너 번씩 올라타고 들어오게 만들었다. 너무나 노래를 잘 불러 도저히 ‘소피’를 참을 수 없다고 했다.

 

 

 

 

니나노판

 

 

 

 

 

 

 

 

결국 그 때 겪은 무전여행은 첫날부터 유전여행(有錢旅行)이 되었고, 거의 퇴폐적(頹廢的) 행사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친구 놈은 강릉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기 전날 밤, 끝내 ‘서울식당’ 미세쓰 '뺑'의 ‘소피증후군’까지 고쳐주고 돌아왔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 친구 놈의 청산유수(靑山流水) 같은 언변은 영주역 ‘군경파견소’에서도 ‘뱁새눈’에게 돈만 빌린 게 아니었다. 저들이 시켜 먹는 얼큰한 육개장을 허리띠를 끌러놓고 먹을 만큼 공짜로 얻어먹기까지 했었다.

 

배경음악으로 ‘수루매’나 ‘이까’노래를 실을까 해서 이리저리 찾아봐도 신통한 것이 없어 그 시절 밤 정거장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미자의 '밤의 정거장'을 게재하여 음미해 본다.

 

 

 

 

 

 

 

 

 

 

밤의 정거장

 

 

 

작사 전   우

작곡 김인배

노래 이미자

 

 

 

 

이슬비 내리는 밤의 정거장

기적도 잠이 들어 가로등만 슬픈데

어디선가 울려오는 여인의 아픈 가슴은

가버린 옛사랑에 희미한 그림자.

 

 

 

이슬비 내리는 밤의 정거장

시름이 찾아들어 가로등만 슬픈데

어디선가 흐느끼는 여인의 깊은 상처는

사라진 옛사랑에 못 잊은 그림자.

 

 

 

 

 

 

 

 

 

 

 

<외동향우회 카페에서 인용>